
유투브를 보다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제목의 컨텐츠가 연일 시야를 자극한다.
대략 '꼭 봐야할 인생영화 TOP 10' '30대에 읽어야 할 인생도서 TOP 5' 따위이다.
도대체 어떤 영화나 책에 누군가의 인생을 거론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인생 영화의 조건은 바로 이것이다.
1. 읽거나 보고 난 후 여운이 남을 것
2. 작품의 내용에 나의 삶이나 생각을 투영할 수 있을 것
3. 그 투영된 삶이나 생각이 생애 주기별로 다르게 나타날 것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번에 읽은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인생 책이 없었던 나에게 처음으로 '인생책이라는 건 이런 것일까' 하고 생각하게 한 소설이다.
소설의 시작은 주인공이 책방에서 어떤 포르투갈 의사가 쓴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만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스위스 베른의 대학교에서 고전문헌학을 가르치며, 고지식하고 우직한 학자이자 교수의 길을 걷고 있는 그레고리우스(주인공)는 등교를 하던 중 다리에서 자살하려는 여자를 구한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 나오는 포르투갈어 하나는 그의 마음 속에서 자갈처럼 잘그락 하며 그를 자극한다. 그 날, 그는 그를 자극했던 포르투갈어를 찾아 들린 책방에서 위에서 언급한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발견하고, 홀린 듯 모든 일상을 뒤로 한 채 그의 흔적을 찾아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뒤의 이야기는 이 책을 처음 읽게 될 부러운 예비 독자들에게 남겨두겠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는 이 책을 읽으며 당신과 꼭 나누고 싶었던 여러 논제들에 관한 것이다. 책의 일부 구절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조금의 스포일러라도 꺼려진다면 기울인 문장들은 넘기길 바란다.
편견 없이 온전히 타인을 보는 것이 가능할까?
"사람들이 타인을 보는 방식은 집이나 나무, 별을 볼 때와 사뭇 다르다. 각 사람의 상상력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과 소원과 기대에 맞게, 하지만 또한 그들로부터 자신의 불안과 선입견이 옳다는 확인을 받을 수 있도록 이들을 각자의 구미에 맞추어 가지런하게 정리한다. 우리는 편견 없이 확실하게 다른 사람들의 외적인 윤곽에조차 다다르지 못한다. (중략) 그의 시선은 내 외모에서 어떤 점을 과장하거나 강조하고, 어떤 점을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빼놓을까?" -128p
우리는 존재하면서부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해왔다. 프로이드는 심리성적발달 이론에서 자아의 발달이 전 생애를 통해 계속된다고 했고, 에릭슨은 심리사회발달 이론을 통해 전 생애를 통해 각 단계의 갈등을 성공적으로 해결할 때 확고한 자아정체감이 발달하며, 특히 12~18세에 identity VS identity confusion 의 시기를 거치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인식하는 과정에서 자아정체감이 형성된다고 했다. 이렇게 형성된 구체화 된 자아는 경험과 가치관의 이름을 한 썬글라스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프라두(책을 쓴 포르투갈 의사)가 말하듯 사람들이 보는 외부세계의 한 부분은 내면세계의 한 부분이기도 하므로 모두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의식적으로 그 사람 자체를 편견 없이 보려고 노력해도 언제나 실패하고 만다.
약간 어의 없는 예시일 수도 있겠지만 내 얼굴에 여드름이 많이 올라오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에 사람들을 만나면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의 피부 상태를 확인하게 된다. 내 구미와 관심에 맞게 다른 사람의 한 부분을 과장하거나 강조하고, 또 그외의 것들의 존재를 빼놓는 예시라고 생각한다. 첫만남의 분위기나 느낌에 따라 '이 사람은 이럴 것이다.'라고 선입견을 씌워 놓은 후 그 프레임 안에서 소통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어 의문이 생긴다. 보이는 모습 그대로 객체를 보는 것이 가능한가? 내 가치관이나 선입견에 따라 타인을 보는 것이 과연 나쁜가? 사람은 자아를 가지고 있는 객체이고 각자의 기준이 있는데, 기준을 두고 타인을 보는 것은 과연 의미 없는 것인가? 오히려 기준 없이 있는 그대로의 객체를 보는 것이 법이 없는 국가처럼 위험한 상태가 아닌가? 나는 존재에 대한 생각은 이미 자신의 역사와 자아 위에서 빚어지는 것이므로 보이는 모습 그대로 볼 수 없으며, 기준이 있어야 판단 근거에 힘이 실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시각들이 편견이나 색안경의 이름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지는 것 같아 아쉬울 때가 있다.
나와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 어렵다
"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레고리우스는 깃털처럼 가벼운 새 안경을 벗고 눈을 문지른 다음, 다시 한 번 썼다. 그런데 사실이었다. 예전 그 어느 때보다 잘 보였다. 사물들은 문자 그대로 눈에 뛰어들 것처럼 보였고, 그의 시선을 끌기 위해 서로 앞을 다투며 밀치는 듯했다. 윤곽이 뚜렷한 사물들은 지나치게 강제적이고 위협적으로 생각됐다. (중략) 그레고리우스의 마음속에서 갑자기 분노가 일었다. 그는 옛날 안경을 쓰고는, 새것을 싸달라 하고 서둘러 계산을 했다. 알파마 구역에 있는 마리아나 에사의 병원은 걸어서 30분 거리였지만, 네 시간이나 걸렸다. 벤치가 보이기만 하면 앉아서 안경을 바꾸어 썼기 때문이다. 새 안경으로 세상은 더 넓어졌고, 공간은 실제로 3차원이 되어 사물들이 마음껏 몸을 펼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세상은 피곤했다. 세상은 더 가까워지고 강제적이 되었으며, 뭔가 확실치는 않았지만 그에게서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138~140p
양쪽 시력이 0.2인 친구가 라섹을 하고 처음 눈을 뜨고는 말했다. "와... 난 오늘 다시 태어난 게 분명해... 니 콧털도 선명하게 보여" 그만큼 선명하게 보였다는 뜻이다. 책의 주인공인 그레고리우스도 선명하게 보이는 새 안경을 쓰고는 내 친구처럼 세상을 처음 본 아기처럼 굴었다. 그런데 감탄만 연신하며 좋아하던 내 친구와 반대로 그는 변화에 분노한다. 새 안경으로 보는 지나치게 뚜렷한 사물들은 그에게 강제적이고 위협적이고 낯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어느때보다 갈등이 깊어가는 세대이다. 특히 우리 사회처럼 짧은 시간에 급격한 변화를 겪은 국가에서 서로 다른 시대를 경험해 온 연령과 집단 간의 세대갈등은 곤혹스럽기 그지없다. 이러한 세대갈등의 골이 깊어진 이유는 각 세대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집단들이 이루어놓은 성과에 대해 인정받고 강요하고 싶어하는 기성세대와 이를 거부하며 서로 다르게 표현하는 젊은 세대, 그리고 이를 인정하기 힘든 기성세대의 갈등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고 있다. 그만큼 타인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모두 다른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 다른 역사를 경험했고, 다른 자아를 빚어, 다른 가치관을 가진 개개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남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그 사람 자체가 되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도 30분이면 갈 거리를 4시간에 걸쳐 낡은 안경과 새 안경을 번갈아 고쳐쓰며 자신과의 힘든 사투를 벌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의 이런 모습이 한심해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기꺼웠다. 그는 새 안경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울지 언정 낡은 안경와 새 안경을 번갈아 써가며 그 간극에 대해 생각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가치관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것과 다른 가치관을 지닌 사람은 거북하다. 내 세상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이질감은 배척하고 싶다. 하지만 다른 가치관의 시야에서 세상을 바라보려고 시도한다면? 신대륙을 발견한 듯 나의 세상은 더 넓어질 것이다.
이를 위해 내가 최근 하고 있는 것은 나의 엄마와 아빠를 이해하는 것이다. 다른 세대를 살아온 부모님과 나는 가치관이 많이 다르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리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고와 행동을 하는 부모님에 화를 많이 났고, 증오하기도 했다. 마치 처음 새 안경을 쓰고 마음속깊이 분노했던 그레고리우스처럼 말이다. 하지만 함께 공유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그들을 대변하는 매체들에 노출이 되면서 과연 나만이 옳은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들도 시대의 피해자이고, 또 개인의 개성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부모님 세대에 대한 자료들에 대해 알아보고, 부모님과 대화하며 그들의 시각에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부모님을 포함해서 세상의 그 누구도 나를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기 때문에 사랑해 마지 않는 두 존재에 대한 이해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최근에 구입한 새 안경이다. 물론 아직 좀 버거워 그레고리우스처럼 4시간 안에 목적지에 도착하기는 힘들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법
"그녀가 가장 먼저 쓰다듬은 것은 바닥이 둥글고 등받이가 휘어 응접실에 있는 의자와 어울리는 책상의자였다. 의자는 방금 전 누군가 급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움직인 것처럼 책상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레고리우스는 무의식중에 아드리아나가 의자를 바로 세우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대로 둔 채 구석구석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녀를 보고서야 기울어진 의자는 아마데우가 30년 2개월 전에 앉았다 일어난 그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바뀌어서는 안 되는 모습..." -168~169p
죽음은 공평하다. 누구나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죽느냐' 그리고 주변에서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이느냐'의 문제가 삶을 의미있게 완성하는 중요한 과제이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연구를 했던 퀴블러로스는 죽음을 5단계로 나누었다. 그녀는 인간이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5단계를 겪는다고 한다.
제1단계 부정
(denial) |
죽음에 대한 통지를 받고 "뭐라고요? 아니에요! 잘못된거에요!"
라고 부정하는 단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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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단계 분노
(anger) |
1단계 후 사람과 신에게 노골적으로 분노하는 단계.
"왜 하필 내 엄마가 죽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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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단계 타협
(bargaining) |
분노 후 타협을 시도하는 단계.
"신에게 기도하고 착한 행동을 하면 괜찮을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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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단계 우울
(depression) |
사랑하는 이를 잃는다는 생각에 슬픔을 느끼는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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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단계 수용
(acceptance) |
죽음을 받아들이는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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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계들을 건강하게 5단계까지 수행하면 삶의 과제를 수행하고 나아갈 수 있지만, 만약 수행 중간에 멈추게 되면 소설 속 아드리아나처럼 죽은 이의 흔적을 변화 없이 그대로 박제하고 그녀 스스로도 과거 아마데우가 살아있던 그 시절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아마데우의 죽음 자체를 부정하는 일 말이다.
지난 2020년 2월, 우리는 새로운 프로젝트의 수행을 방송으로 관찰했다.


'MBC 스페셜' 팀과 VR 기술진이 구현한 가상의 딸
바로 'MBC 스페셜'팀이 국내 VR(가상현실) 기술진과 협력해 실제 나연이 모습과 가깝게 영상을 구현해 VR 체험으로 재회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긍정적인 면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사랑하는 딸에게 해주지 못해 가슴속에 아픔으로 남았던 말이나 행동을 해소할 수 있는 배출구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문제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온전히 본인에게 있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현실같은 가상세계의 구현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단계를 수행하고 있는 개인에게 죽은이에 대한 현실감을 심어 줌으로써, 2단계로 넘어가지 못한 채 부정을 반복할 수 있다. "여기 봐라, 내 딸이 여기 눈 앞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데, 죽었다는 게 말이 되냐."는 말이 충분히 가능성 있지 않은가. VR 기술에 대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금과 같은 방향으로 구현하여 사용하는 것이 옳은가, 기술의 발전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재고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이 논제들은 내가 책을 고작 반절정도 읽었을 때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던 내용이다. 이 외에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의 내가 선택한 방향이 아니라 다른 방향을 선택할 것인가, 당신이 의료인일 때 히틀러처럼 사람을 학살할 게 분명한 악인이 눈 앞에서 죽어가고 있다면 살릴 것인가, 생각을 표현하지 않는 말이나 쓸데없는 수다는 의미있는가, 이기지 않고 패배함으로서 행복한 적이 있는가 등 나누고 싶은 얘기가 많다. 책 후기와 이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당신에게 의미있는 질문들이 되기를 바란다.
내용출처 :
방경숙 외, 아동간호학, 정담미디어(2014), 88-91p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7445371&memberNo=21959512&vType=VERTICAL <MBC 스페셜>